SCP와 변칙에 대한 잡설

SCP 재단(혹은 SCP 재단 사이트)에서 '이건 SCP다', '이건 변칙성이 있다'라고 분류하는 것은 상당부분 직감으로 이루어진다. 보고 있지 않을 때 움직이는 동상 같은 것에 변칙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SCP와 변칙성을 정의하고 설명하고자하면 복잡함이 존재한다.

변칙성을 정의해보라고 하면 단순하게는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SCP를 정의해보라고 한다면 단순히 변칙적인 존재, 이상징후나 변칙개체를 고려했다면 조금 위험하고 지속성이 있는 변칙 개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이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직관대로 분류해서 대충 다이어그램으로 만들어봤다. 보면 알겠지만, 위의 정의가 완전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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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우선 변칙과 현대 과학의 관계를 보자. 여기서 변칙은 단순히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지칭한다고 볼 수 없다. 물론 대부분은 겹치긴 하지만, 현실에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간의 억지를 부려서 초상과학도 과학이라고 인정한다면, 기적술과 같이 변칙이지만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존재한다. 어차피 이것을 분류하는 것은 재단 마음대로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흑인 노예들이 노동을 거부하는 것은 변칙적인 현상으로 지정했지만, 수성의 경로가 계산과 다른 것은 변칙적인 현상으로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SCP와 다른 것들의 관계를 보자. SCP는 크게 4가지 범위에 걸쳐있다. 우선 변칙이고 현대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경험상으로 대부분의 SCP는 여기에 속한다.

그 다음으로 변칙이지만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대충 SCP-2000이 여기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저것 초상 기술로 어떻게 만든 것이니까. 아예 괴델(Gödel)이라는 전용 등급도 있다.

그리고 변칙은 아니지만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SCP-2460이 좋은 예시인데, 간단하게만 설명하자면 지구 주위를 돌고있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이 암흑물질이라는 것을 복잡하게 설명해놓은 SCP다. 그 안에 죽은 외계인이 담긴 UFO도 있긴 한데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SCP지만 변칙도 아니고 현대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있다. SCP-1012가 좋은 예시인데, 대충 특정한 화음이 발생한다면 특정 입자가 붕괴하고 이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우주가 멸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재단의 우주론적 모형에 따라 예측한 결과라는 것인데, 다시말해 이 현상은 물리법칙 그 자체라서 변칙이라고 볼 수 없으며,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예시로 SCP-1949도 들 수 있는데, SCP로 지정된 평범한 인간 조너선 해리스가 어떤 계약 때문에 SCP로 취급받고있다는 내용이다. 약간 논란이 있어서 좋은 예시는 아닐 수도 있다. 1949는 클레프 작품인데 본사 작가인 Ihp는 '변칙성도 없는데 이게 무슨 SCP냐, 클레프 이름빨로 살아있는 거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나머지 부분은 알아서 보면 될 것 같다. 크게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SCP는 변칙만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변칙적이지 않아도 SCP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 확장하자면, SCP로 분류하는 명백한 기준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이 4가지 분류에 걸친 SCP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대중들이 보기에 많이 이상하고 알면 큰일 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000, 2460, 1012 전부 다 그렇다. 그리고 이건 재단의 강령과 연결된다.

재단의 활동은 정상 상태를 유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민간인들이 공포, 불신, 의심에 빠지지 않고 일상 생활을 영유하게 하며, 지구 외 세계나 다른 차원의 세계를 비롯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비정상적 영향력에서 인류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특수 격리 절차Special Containment Procedures

재단은 특수 격리 절차를 필요로 하는 변칙 존재들에 대한 광범위한 데이터베이스를 유지하고 있으며, 해당 변칙 존재들을 흔히 “SCP”라고 부른다. 재단의 1차 데이터베이스는 이러한 변칙 존재들에 대한 요약 설명과 안전한 격리를 유지하는 절차 또는 격리 파기 사태 또는 다른 상황이 발생했을 때 격리 상태로 복구하기 위한 절차를 서술하고 있다.

- SCP 재단에 대하여 -

모든 SCP들은 이것들이 민간에 알려졌을 때 정상 상태에 혼란이 올 수 있는 것들이다. 즉, 재단의 가치인 인류의 안위에 심각한 손상이 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재단은 이 존재들에게 '특수 격리 절차'를 적용해서 인류의 안위를 지킨다. 따라서 거칠게 정의하자면, SCP는 '재단의 강령에 따라 특수 격리 절차가 필요한 존재' 정도가 될 것이다. 더 거칠게 말하자면 '재단 마음대로 정의된다'.


지금까지는 직관대로 현대 과학, 변칙, SCP의 관계를 분류해봤다. 그래서 변칙이란 무엇일까? 세계관 내에서 이를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이 흔히 사용되곤 한다. 이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 WJS의 제안으로 O5들이 회의해서 합의 현실(대다수에 의해 인정되는 현실)을 정하고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변칙 활동이라 정의된다는 내용이다. 대충 패러다임에서 정상 과학은 합의 현실에 대응되고 이 정상과학의 변칙사례 중 특정한 것들은 재단의 변칙성으로 분류된다고 볼 수 있다.

변칙이 인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에 대해 규장각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거기서 나온 사고실험 하나를 소개하자면,

하지만 정의내릴 관찰자가 없다면, 예를 들어 "안드로메다 은하 XXX 지점에는 혹등고래가 존재한다" 라는 현상이 만약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것을 변칙이라고 정의내릴 인간 관찰자가 없다면 딱히 변칙이 아닌 게 아닐까요? 우리는 "혹등고래가 그곳에 존재하는 사실이 물리법칙에 위배된다, 고로 변칙이다" 라고 말하겠지만,사실 우주의 물리법칙에 딱 오직 그 혹등고래만을 위한 법칙이 있지 않을거라 보장할 수 있을까요? (링크)

이 사고실험이 주장하는 바는 '어떤 현상, 사물에 대해 변칙이라고 정의내릴 주체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없다면 혹등고래는 주어진 상황대로 살아있을 것이고 우주는 그냥 주어진 모습대로 존재할 것이다. 이것을 누군가가 변칙이라고 여기지 않는 이상 그것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표현한 것을 인용하자면, '이상하게 여겨 해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것' 중에서 '인간 지식의 연장선에서 상정되지 않는 것(단 사건의 지평선 너머나 빅뱅 이전같이 '변칙은 아니지만 알 수 없는 것'은 배제함)' 정도가 된다. 그리고 이것의 기준은 '작동 기제에 비약이 존재하는가'라고 볼 수 있다. SCP-173으로 들었던 예시를 발췌하자면,

  1. 조각상이 있음
  2. 조각상을 지켜보는 동안엔 움직이지 않음
  3. 조각상을 지켜보지 않으면
  4. 어떻게?
  5. 조각상이 움직임

여기서 4단계가 비약에 해당한다. 물리적, 직관적으로 분명히 불가능한 단계가 있으므로 변칙인 것이다. 결론은 마음대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O5가 정한 것이 바뀌든 말든 변칙으로 고정되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변하는 변칙을 정의하는 가장 간단하고도 확실한 방식은 우리 우주, 즉 '현실과 재단 세계관의 차이'를 토대로 정의하는 것이다. 현실과 우리 우주를 비교했을 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변칙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SCP-173 뿐만 아니라 무진시, 위에서 과학적&비변칙적 SCP의 예시로 나온 SCP-1012, 재단이나 GOC 같은 기관도 전부 변칙에 포함된다. 일종의 형이초학적인 정의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방식은 변칙을 정의하기 위해 현실을 끌어와야만 한다. 즉, 세계관 내적으로는 변칙을 정의할 수 없고 세계관 외적으로만 변칙을 정의할 수 있다. 작가나 독자는 변칙이 뭔지 알 수 있겠으나, 작품 내의 인물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작품에 쓸 수 없는 정의인 것이다.

세계관 내적으로 불변하는 변칙을 정의하는 방식은 여러 작품에 드러나있다. 프로젝트 제안서 1985-02: "홀로 선"의 경우 이 불변하는 변칙을 SCP-5004클레프 죽는 이야기를 참고해서 현실성 침강을 통해 설명한다. 현실성 침강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블랙홀처럼 작용하는 자연 현상으로 미지의 것이 퍼져나가는 것에 대항하는 자연적인 균형 시스템의 일종이라고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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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해당 작품에서 각각의 특성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은비는 정상성의 정의와 상관없이 자연법칙상에 모종의 공통된 특징들을 나타내는 존재의 물리적 상태이다. 현실성 침강에 반응한다.

초상은 은비를 대부분 포함하며, 또한 O5 평의회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는 존재의 합의적 상태이다. 장막 정책의 기준이다.

사회적 변칙성은 비총의적 정상성과 초상성의 교집합이다. 비변칙적이나 여러가지 이유로 변칙적이라고(=격리 대상이 되는) 취급받는 개체들이 있다.

사회적 정상성은 은비성과 총의적 정상성의 교집합이다. 변칙적이나 여러가지 이유로 비변칙적이라고(=비격리 대상이 되는) 취급받는 개체들이 있다. 재단의 타이콘데로가나 아르콘 등급들이 예시.

변칙성은 초상과 은비성의 합집합이다.

즉 여기서는 은비가 불변하는 변칙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참고해 재단은 초상을 정의하고 이를 토대로 격리 절차를 실행한다. 사회적 변칙성은 앞에서 언급했으니 넘어가고, 사회적 정상성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정상성은 변칙적이지만 비변칙적이라고 취급받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난해한 등급 중 타이콘데로가나 아르콘 등급이 있는데 더 유명한 것으로 설명하자면 SCP-8900-EX를 들 수 있다. 8900-EX는 명백히 변칙적인 현상이지만, 이제는 더이상 변칙으로 취급되지 않는다(초상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비라는 개념을 더했음에도 우리는 변칙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다. 은비의 범위, 즉 현실성 침강이 적용되는 범위에 명백한 설정이 없어서 그냥 작가 마음대로이기 때문이다. 위의 클레프 죽는 이야기만 보더라도 클레프가 예외적으로 볼 수 있는 변칙존재가 3가지나 있다.

불변하는 변칙을 정의하는 다른 작품으로는 크리스크의 제안이 있다. 이 작품에서 변칙과 비변칙을 가리는 기준은 그냥 심리적인 기제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20만년 전 발생한 전지구적 밈적 현상에 의해 형성된 두려움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도 우리는 변칙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작가 마음대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기제는 작품 내에서만 존재한다. 위의 두 예시 모두 세계관 내적으로는 변칙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으나, 세계관 외적으로는 정의내릴 수 없다. 거칠게 말하자면, 작품에서만 변칙성을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작품을 쓰는 작가 마음대로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봤을 때, 변칙이나 SCP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결국 한계에 부딪힌다. 세계관 외적 요소로 정의하는 방식은 작품 내에서 쓸 수 없으며, 세계관 내부의 기준으로 정의하는 방식은 작가의 마음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다시말해, 세계관 외적으로 정의하면 세계관 내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고 세계관 내적으로 정의하면 세계관 외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어떠한 통일된 논리적인 기준에 따라 정의하는 것은 현실의 과학철학(혹은 그냥 철학)에서 그러했듯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SCP의 분류 기준이나 변칙의 분류 기준은 명확하지 않으며, 임의대로 정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기준은 세계관 내적으로 봤을 때는 재단이나 여타 초상기관에 따르며, 세계관 외적으로 봤을 때는 작가와 독자의 기준에 따른다. SCP와 변칙의 기준은 작가가 쓴 작품에 기반하며, 이 작품은 독자가 평가해 생존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순전히 재단 커뮤니티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은 적당히 세 줄 요약으로 장식하자.


세 줄 요약:

  1. SCP는 재단 마음대로 지정된다.
  2. 변칙은 마음대로 지정된다.
  3. 누가 SCP가 뭔지 묻는다면 그냥 괴물 비슷한 건데 아닌 것도 있다고 말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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